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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간 詩와 글216

[시] 무죄 무죄 - 임은숙 꽃에 취한 키 큰 나무 정수리에 달이 턱을 괴고 길 잃은 바람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고요한 듯 술렁이는 사월의 밤 나무가 꽃을 원했는지 꽃이 나무를 불렀는지 나무숲이 통째로 흔들린다 달빛에도 길을 찾지 못한 눈 먼 바람의 격한 숨소리 요란타 봄이기에 가능한 모든 흔들림은 무죄다 이제 꽃은 가라 향기만 두고 꽃은 가라 2024. 1. 19.
[시] 이 봄에는 이 봄에는 - 임은숙 햇살이고 싶다 소녀의 반짝이는 이마에 오뚝한 콧등에 곱게 내려앉는 맑은 햇살이고 싶다 바람이고 싶다 중년여인의 결 좋은 머리칼을 곱게 빗질하며 그녀의 귓가에 음악처럼 머무는 부드러운 봄바람이고 싶다 들꽃이고 싶다 외로운 이의 핏기 없는 얼굴에 소박한 향기로 미소를 그려주는 작은 들꽃이고 싶다 초록의 이름 앞에선 아직도 출렁이는 설렘을 감출 수 없어 이 봄에는 햇살이고 싶다 바람이고 싶다 들꽃이고 싶다 2024. 1. 18.
[시] 계절의 미아 계절의 미아 - 임은숙 바람이 분다 분분히 흩어지는 낙엽들처럼 이제 서로에게 안녕을 고할 때 돌아보아 아름답지 않은 것 있을까마는 유난히 빛나는 기억 하나에 발목이 잡혀 온갖 흐름을 잊은 미아가 된다 메마른 상념의 길로 문득문득 솟구치는 이름 모를 충동 세월의 바람 앞에 고스란히 식어가는 한때의 뜨거움이 잔잔한 마음에 수시로 파문을 일으키는데 가을을 담기에 아직은 이른 마음의 푸른 숲엔 여전히 네가 있고 내가 있고 꽃이 피고 새가 울고 2024. 1. 17.
[시] 밤에 대하여 밤에 대하여 - 임은숙 평온하지만 가볍지 않고 고요하지만 의외로 무겁지 않다 어둠은 침묵으로 세상을 꾹꾹 눌러 스무 네 시간의 빛을 짜낸다 어둠은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를 주며 슬픔을 기쁨으로 보라고 절망을 희망의 노래로 들으라 한다 끝없는 방황도 거듭되는 몸부림도 여명 전의 어둠이 감싸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새아침을 맞는 것만큼이나 경이로운 어둠과의 재회 또한 얼마나 다행인가 2024. 1. 16.
[시] 퍼즐 맞추기 퍼즐 맞추기 - 임은숙 꽃이 피지 않는 봄은 얼마나 삭막할까 구름을 품지 않은 하늘은 얼마나 단조로우며 네가 없는 나의 하루는 또 얼마나 길까 모든 것에 일정한 빈자리를 두어 퍼즐함정을 만드는 세상은 요지경인가 겨울 끝자락에 봄의 자리 남겨두고 꽃잎 사이 바람의 길을 틔워놓고 태양의 자리를 메우는 달과 자정의 고요를 깨뜨리는 흐느낌과 새벽이슬에 뒤섞인 슬픔 한 방울 밤의 꽁무니에 바람처럼 매달리는 아침이 있다 2024. 1. 16.
[시] 기쁜 동행 기쁜 동행 - 임은숙 봄 한철 피는 꽃들은 욕심이 없다 진달래 개나리 민들레 제비꽃... 모양새도 다르고 색깔 또한 각각이지만 하나의 숲에 하나의 계절에 피는 것만으로도 좋다 바람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저마다의 향기로 숲을 흔든다, 계절을 장식한다 영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너와 내가 우리라는 이름 안에 꽃으로 피어 기쁜 동행의 길에서 서로의 향기로 계절을 물들인다 2024. 1. 15.
[시] 이방인 이방인 - 임은숙 계절 따라 피는 꽃들과 나뭇잎 사이 노래하는 새들과 해질녘 붉은 노을과 밤하늘에만 존재하는 별 모든 것이 하나같이 낯설어서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됩니다 구름이 크든 작든 그 속엔 빗물이 고이는 법 사랑의 깊이와 눈물의 무게 또한 정비례된다는 사실 모르고 살았습니다 푸른 계절에 이토록 눈시울이 젖어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요? 안개꽃같이 여린 슬픔 사이로 또 한 계절이 가고 있습니다 2024. 1. 14.
[시] 송년 송년 - 임은숙 괜히 서글퍼지고 연거퍼 한숨이 나오고 잇닿은 허무에 안주 없는 술잔을 기울이고 꺼이꺼이 울지 못해 가느다랗게 흐느끼고 작고 초라해진 자신에게 원치도 않는 나이 하나 선물하며 세월무상의 합병증을 앓는다 2024. 1. 13.
[시] 건망증 건망증 - 임은숙 이제 세월을 잊고 싶다 희미하게 빛바랜 오래 전의 모습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고 싶다 한 번쯤 해봐야지 했던 일들과 꼭 해보고 싶던 일들을 젊음의 여백에 하나둘 모아두며 자신을 위한 것도 타인을 위한 것도 아닌 하루하루를 버릇처럼 탕진했다 짙어가는 가을빛에 멋대로 내 안에 떨어져 쌓이는 낙엽들을 세며 때로는 모든 흐름을 잊고 간헐적 건망증을 앓고 싶다 2024. 1. 12.
[시] 중년의 그대에게 중년의 그대에게 - 임은숙 잠 못 이루던 그대의 어느 새벽에 대하여 멀어져간 그대의 어느 가을에 대하여 나는 아는 것이 없네 푸릇하던 그대의 젊은 날에 대하여 뜨겁게 타오르던 그대의 사랑에 대하여 나 또한 아는 것이 없네 하지만 새소리 맑은 숲길에 그대가 흘린 긴 한숨과 반백의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체념의 눈빛은 분명 듣고 보았네 그대 눈빛이 말하네 물처럼 흐르는 거라고, 돌아오지 않는 거라고 우리네 인생 그런 거라고 그대 눈빛이 말하네 곧게 가라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그렇게 사는 거라고 2024. 1. 12.
[시] 인연 인연 - 임은숙 인연은 여기서 저기까지 식의 거리가 아닌 시간으로 재는 겁니다 그대와 나의 인연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허락되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건 원하던 원치 않던 날이 갈수록 남은 인연의 시간이 줄어든다는 겁니다 종착지라도 알면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정착하련만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이별이라서 초조와 불안에 마음은 늘 분주합니다 평생이 스무 네 시간이듯 오늘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대로 하여 파랗게 흔들리며 그대를 위해 향기를 뿜으며 소중한 인연의 강에 옷깃을 적셔야겠습니다 2024. 1. 11.
[시] 흐린 날의 풍경 흐린 날의 풍경 - 임은숙 너의 어깨가 비에 젖지 않도록 다시는 비에 젖는 일 없게 우산이 되고 싶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쫓기 듯 작은 방을 빠져나와 거리를 헤매군 했다 도시 구석구석에 쓸쓸히 나뒹구는 기억들 젖어있는 모든 것이 너여서 너였다가 나마저도 온통 젖어버려서 도시 전체를 가릴 수 있는 거대한 우산이 나에겐 필요했다 2024.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