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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간 詩와 글216

[시] 슬픈 재회 슬픈 재회 - 임은숙 낡은 노트의 오래된 기록처럼 일말의 온기마저 남아있지 않는 서먹한 눈빛에 간신히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기고 넓은 테이블이 벌려놓은 두 사람의 거리 심히 낯설다 흩어진 언약들 애써 긁어모아도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옛 풍경은 같은 시간을 뜨겁게 뛰어온 사실조차 의심케 했다 너와 나 우리였던 적이 있던가 시간 저편으로 밀려난 메마른 추억이 어두운 창에 바람처럼 매달린다 2024. 3. 12.
[시] 불안의 인기척 불안의 인기척 - 임은숙 지금 내 마음에 키 재기를 하며 일어서는 어수선한 생각들 수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어리석은 내게로 와서 방황의 이름으로 성장을 꿈꾸는 딱히 잡히지도 않는 것들 무질서한 움직임에 무의미한 노력, 내지는 발악 결국엔 스스로 주저앉고 스며들고 사라질 것들이 낯선 어둠 앞에 희미한 불씨로 무겁게 남았다 2024. 3. 11.
[시] 봄이 끝나갑니다 봄이 끝나갑니다 - 임은숙 바람이 느슨해지고 어디선가 맑은 기운이 전해지면 봄이 온 줄 알았습니다 언뜻언뜻 눈에 띄는 연초록 물감과 저들만의 색깔로 여러 꽃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봄이 온 줄 알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에 섞이어 나도 봄이 되곤 했습니다 바람이 누그러든 줄 몰랐습니다 새싹이 돋는 줄 몰랐습니다 화사한 꽃들이 잔치를 벌인 줄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분명 내 옆에 머물렀을 봄이 떠나는 기척에 소스라치며 따라나설 듯이 신발을 찾습니다 2024. 3. 10.
[시] 가을에 서서 가을에 서서 - 임은숙 오월목련에 비할까 손바닥 같은 꽃단풍 그 황홀이 지나치다 혼자 보기엔 서럽기까지 한 붉디붉은 그리움을 노을빛 봉투에 꽁꽁 눌러담아 아무 데고 날리고픈 11월의 해질녘에는 밤새 뒤척일 이유 하나 정도 쉬이 만들 수 있다 인적 끊긴 숲길에 바람이 떨어뜨린 약속들이 용케 제자리 찾아가는 지난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계절 당당하던 푸름을 벗어던진 계절 눈빛이 뜨겁다 2024. 3. 9.
[시] 단풍 아래 잠들고 싶다 단풍 아래 잠들고 싶다 ​ - 임은숙 ​ ​ 아직 고운 단풍 앞에선 외로움을 말하지 않는다 ​ 미처 전하지 못한 뜨거운 얘기 꼬깃꼬깃 접어서 11월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가까이서 들은 적 없는 계절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 봄에 피는 꽃보다 가을에 익는 단풍으로 살 일이다 ​ 계절보다 먼저 오고 뒤늦게 가버리는 결코 질리지 않는 그리움이 바람의 꽁무니에 한사코 매달리는데 이대로 조용히 단풍 아래 잠들고 싶다 2024. 3. 8.
[시] 2월에 내리는 비 2월에 내리는 비 - 임은숙 군데군데 얼룩진 겨울의 흔적 깨끗이 지우지도 못할 거면서 2월의 비가 철없이 내리고 있습니다 겨울도 아직이요 봄도 아직인데 겨울비라 할까요? 봄비라 할까요? 빗물 흐르는 창가에서 그대 괜히 서성이고 있다면 슬픈 음악 귀에 담고도 눈시울 붉히지 않는다면 창밖에 내리는 건 겨울비도 봄비도 아닌 겨우내 쌓인 그리움입니다 신록으로 대체될 순백의 계절 끄트머리에서 잔잔히 그리움이 내리고 있습니다 2024. 3. 8.
[시] 밤차 밤차 - 임은숙 비 내리는 오후 다섯 시의 간이역에 나를 닮은 사람 몇몇이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시계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고 뭔가 생각에 잠겨있다 모두가 뿔뿔이 흩어질 시간 어둠만이 무겁게 하나로 뭉치고 플랫폼에 들어서는 둔중한 밤차의 고동소리 심히 낯설다 지나간 모든 것이 아름답지만은 않은 법 더러는 붉은 상처로 남아 긴 울음이 되기도 한다 차창 너머로 언뜻언뜻 스치는 가로등 불빛의 젖은 흐느낌이 긴 밤의 서곡(序曲)처럼 귓가에 매달리는데 종착지를 향해 질주하는 밤차의 거친 숨결이 비장하다 2024. 3. 7.
[시] 사랑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 - 임은숙 ​ ​ 쪽빛 하늘 아래 나무와 바람의 속삭임이 정답다 ​ 긴 세월 이어지는 둘만의 밀어 ​ 남겨둔 그리움이 있어서 부르는 손짓이 있어서 어쩌면 언젠가 바람처럼 나를 스친 너 바람처럼 다시 올지도 ​ 먼 기억에 눈시울이 젖어드는데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 ​ 사랑이었을까 몸살 같은 그 감정들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2024. 3. 7.
[시] 그것이 인연인 걸 그것이 인연인 걸 - 임은숙 시작과 끝은 결국 하나인 것을 식어버린 찻잔과 두 의자 사이의 간격을 왜 바보처럼 외면하려 했을까 만남에서 이별로 완성되는 그것이 인연인 걸 노을빛 강물 위에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놓치고 나면 아무리 간절해도 잡을 수 없는 그것이 인연인 걸 2024. 3. 6.
[시] 기억의 숲을 거닐다 기억의 숲을 거닐다 - 임은숙 마음 한구석에 조그맣게 옹크리고 있다가 문득 솟구치는 기억에 생각은 어느덧 계절을 거슬러 옛 풍경 속에 섭니다 이제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아침을 맞는 그대와 내가 한 공간에 머물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헤어나고 싶지 않은 안개 자욱한 기억의 숲입니다 여름날 오후 무심코 펼쳐든 낡은 책갈피에서 부서지듯 바닥에 내려앉는 색 바랜 단풍잎이 불러온 기억입니다 잊으려고 놓으려고 버리려고 다짐을 거듭했던 그 가을이 다시 그리워지는 뜨거운 여름입니다 2024. 3. 6.
[시] 여름의 창을 닫습니다 여름의 창을 닫습니다 - 임은숙 구월이 왔습니다 아직은 느낌 뿐인 가을입니다 시월에는 견주지 못할 향기를 조용히 펼쳐놓으며 내가 걷는 길 위에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을 배신한 바람이 청자빛 하늘을 배회하고 꽃잎마다에 가을을 담은 코스모스의 몸짓이 심히 가볍습니다 붉은 단풍을 하나 둘씩 터뜨리며 이제 가을은 서서히 키를 늘려가겠지요 꽃의 화려함을 부러워하지 않겠습니다 단풍의 눈부심을 사랑하겠습니다 이제 여름의 창을 닫습니다 2024. 3. 5.
[시] 시월이 간다 시월이 간다 ​ - 임은숙 ​ ​ 어딘가에 꽁꽁 숨어버린 바람을 찾아 구절초 만발한 들녘에서 하루해를 보내고 내가 쫓는 건지 끌려가는 건지 모를 바람과 나란히 시월의 끝자락에 섰다 ​ 때가 되면 절로 나타나서 내 등을 밀거나 앞머리를 쓸어 올릴 것을 ​ 약간의 서운함이 가슴 밑바닥에 깔려있을 뿐 지금까지도 놓지 못한 오월을 보낼 때처럼 아프거나 슬프지 않다 ​ 보낸다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온다는 믿음이다 ​ 창밖의 가을비소리 내려앉을 어둠에 처량함을 감추는데 아름다운 재회를 위한 시월의 이별가에 가슴이 뛴다 2024.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