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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간 詩와 글216

[시] 바람 부는 날의 카페 바람 부는 날의 카페 - 임은숙 해질녘 노을 통째로 밀려듭니다 넓은 유리창 온통 붉은 빛입니다 멀리 백양나무숲에서 바람이 일고 몇 마리 새가 날아오르는데 들리지 않는 바람소리와 새들의 아우성이 환청처럼 귓가에 맴돕니다 커피 한 잔이 고스란히 식을 때까지 어둠이 내린 창에 내 옆모습이 뚜렷이 그려질 때까지 나무 정수리를 밟는 하얀 달의 걸음소리 자장가로 흐를 때까지 세상과 철저히 차단된 자정의 짙은 고요 속에서도 달달한 모카 향과 백양나무숲의 바람소리와 새들의 북적임이 함께였습니다 2024. 2. 20.
[시] 내 생에 봄 내 생에 봄 - 임은숙 일어서는 것들 흐르는 것들 흔들리는 것들 사면팔방 온통 봄의 소리다 바람인양 그 소리 사이사이를 비집고 간다 어느새 신록의 계절 꽃밭에 서면 꽃이 될까 바람 앞에 서면 향기가 될까 작은 스침 하나에도 뚝뚝 묻어나는 설렘과 환희 내 생에 봄은 바로 지금이다 2024. 2. 19.
[시] 소나기인생 소나기인생 - 임은숙 오월 초순이지만 입하立夏가 지났으니 창을 적시는 촉촉한 저 비 봄비 아닌, 분명 여름비일 것입니다 가슴 뛰는 설렘에 잔뜩 부푼 봄비도 좋지만 이왕이면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여름 소나기에 푹 젖고 싶습니다 천천히 마르고 다 마르고서도 여린 피부에 아프게 닿는 젖었던 옷의 촉감 같은 쓰린 기억이 가끔은 필요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가늠할 수 없는 비안개 사이를 차겁게 방황하던 뜨거운 가슴이 내게도 있었음을 서녘의 노을을 마주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허연 머리칼을 날리는 낯설지 않은 모습을 떠올립니다 소나기 같은 찰나의 인생입니다 한 번 뿐인 그 순간에 올인하여 반짝 빛나고 스러지는 참인생이였으면 좋겠습니다 2024. 2. 18.
[시] 5월의 아침 5월의 아침 - 임은숙 낮은 지붕 위로 넘어오는 5월의 바람이 푸른 달력에 향기를 더해준다 꽃이 피어 봄인 줄 알았는데 익어가는 이파리 어느새 유월을 향하고 있다 여러 꽃들의 숨바꼭질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나날들 아직은 봄이라고 어제까지 고집하던 연분홍 꽃잎이 여름인가 여름이네 속삭이다 크게 외치는 순간 나뭇잎사이 찬란히 부서지는 햇살에 사방(四方)이 금빛으로 물들어 눈이 부시다 2024. 2. 17.
[시] 봄에 한 약속 봄에 한 약속 - 임은숙 생기를 잃어가는 꽃잎을 입에 물고 내년에 다시 만나자 진달래와 한 약속 꽃샘바람에 사무치다 다정한 향기 코끝에 닿을까 말까 봄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아니, 아마도 겨울 안에 봄이 숨어있었나 보다 가버린 척 숨 죽이고 있다가 보드라운 바람 속으로 눈부신 햇살이 키재기를 하는 아침 약속의 꽃잎을 활짝 피우리라 찬란한 그 모습에 내 눈이 감기고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향기로우리 2024. 2. 16.
[시] 세월이 녹는 소리 세월이 녹는 소리 - 임은숙 열아홉에 귀 아프게 듣던 잔소리 마흔아홉에 입 아프게 한다 열아홉에 눈부시던 봄날이 마흔아홉에는 이토록 눈물겹다 열아홉 가을엔 단풍만 보이더니 마흔아홉 가을엔 낙엽만 보인다 푸른 시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 선명하게 안겨오는 것은 아마 세월 탓이리라 나이 탓 아닌 세월 탓이리라 첫눈이 하얗게 퍼붓는 밤 세월이 녹는 소리 크게 들렸다 2024. 2. 15.
[시] 5월이 가네 5월이 가네 - 임은숙 아주 잠깐이라는 5월이 나에게는 길고 길었네 피는가 싶더니 어느새 골목 가득 처량한 꽃잎들 꽃잎의 그 아픔 모두 내 것이 되었네 봄비에 젖는 모든 것 아름답지만은 않듯이 바람에 스치는 모든 것 설레지만은 않듯이 온 지도 이슥한 5월이 결코 지겹지만은 않네 먼 아쉬움 같은 향기 곳곳에 뿌려두고 몸만 살짝 5월이 가네 2024. 2. 15.
[시] 내일은 없다 내일은 없다 - 임은숙 십년을 살아본 사람은 있어도 이십년, 삼십년, 사오십년 살아본 사람은 있어도 내일을 살아본 사람은 없다 내일 앞에서는 그 누구나 초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분명 어제의 내일이건만 오늘이라 한다 내일에 기대지 말자 어제도 내일도 아닌 우리에게는 오늘뿐이다 일단 뛰고 보는 것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오늘뿐이다 2024. 2. 15.
[시] 밤의 예찬 밤의 예찬 - 임은숙 태양빛으로 눈부신 한낮의 아름다움은 없지만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펼쳐놓는 고요의 적나라함이 있습니다 모종(某種)의 신비로 사색의 폭을 무한히 넓혀줍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향기 자체를 잊고 지내는 한낮의 바람보다 은은함으로 말을 걸어오는 여유로운 밤바람이 좋습니다 시각마다 힘이 들어가는 눈 끝의 고단함이 없습니다 가장 편한 자세로 모든 걸 내려놓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함 이뤄질 수 없더라도 내일의 꿈을 마음껏 그리며 설렘으로 뒤척일 수 있는 자유의 밤이 좋습니다 2024. 2. 14.
[시] 천사 다녀갔습니다 천사 다녀갔습니다 ​ - 임은숙 ​ ​ 작은 어깨너머로 늘 상서로운 빛이 감돌았습니다 ​ 무한의 높이에서 굽어보는 따뜻한 눈빛 대지에 뿌리 내린 한 그루 드팀없는 나무였습니다 ​ 비 오는 날엔 빗줄기를 막아주고 바람 부는 날엔 솜 같은 이파리들로 포근히 감싸주는 날개를 감춘 천사였습니다 ​ 아낌없이 내어주고 나눠주는 순하고 착한 날개 볼품 없이 망가져 찬바람 앞에 허연 뼈를 드러내는데 ​ 가냘픈 어깨 위에 서서히 펼쳐지는 거대한 날개 눈이 부시어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 천사가 머물던 자리에 한 겨울 햇살 한 줌 찬란합니다 2024. 2. 14.
[시] 인연의 법칙 인연의 법칙 - 임은숙 내게로 오는 사람 내게서 가는 사람 오고 가는 계절은 섭리라도 있지마는 사람과 사람 사이 인연에는 딱히 정해진 법칙이 없다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피할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가고 나면 다시 오지 않는 설사 온다 하여도 더 이상 가슴 뛰는 시작이 아닌 인연이란 멀어진 뒤에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놓치고 나서 후회하는 무거운 아쉬움이다 2024. 2. 14.
[시] 황혼을 걷다 황혼을 걷다 ​ - 임은숙 ​ ​ 저무는 강 위에 그림자 길게 드리우고 낮달이 희미하게 웃고 있다 ​ 도시의 혼탁함에 맑은 아침을 잊고 살았던 잿빛의 나날들 ​ 길게 기지개를 켜자 ​ 아침을 위한 준비는 자정과 새벽만의 것이 아니다 ​ 황혼의 고요를 거치지 않고서 어찌 자정의 무게와 새벽의 설렘이 있으랴 ​ 어제와는 사뭇 다른 서녘의 아름다움에 전율하며 붉은 황혼을 걷는다 2024. 2. 13.